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시 프랑스 (문단 편집) == 역사 == [[프랑스 제3공화국]]은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전황이 쉽게 풀리지 않고 급기야 [[겨울전쟁]]으로 [[핀란드]]마저 무너지자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이 붕괴되고 [[폴 레노]] 내각이 출범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침공]]의 시작으로 프랑스는 참혹하게 패배하면서 밀리기 시작했고 레노 내각은 [[마드리드]]에 파견되어 있던 84세의 노인 [[필리프 페탱]]을 부총리에 임명함으로 국가적 단결을 도모했다. 하지만 전황은 계속 악화되어 6월 10일, 프랑스는 [[보르도]]로 천도하고 [[1940년]] [[6월 13일]]에 수도 [[파리(프랑스)|파리]]마저 함락되었다. 통제력을 상실한 레노는 6월 16일 하야했고 이미 6월, 의회 결의를 통해 전권을 위임받은 페탱이 프랑스의 수반에 등극하게 된다. 페탱은 6월 17일, 정전을 호소하였고 독일과의 협상 끝에 매우 가혹한 조건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3/5에 해당하는 북프랑스가 통째로 나치 통치에 넘어가고 나머지 2/5의 남프랑스가 자치권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것이 프랑스에 세워진 친독정권인 비시 프랑스이다. 이후 페탱은 7월 1일, 비시에서 신정부를 수립한 후 7월 10일 개헌에 들어가서 [[프랑스 제3공화국]]의 종식을 고하고 7월 11일, 신헌법을 반포, 프랑스 공화국의 명칭을 폐기하고 프랑스국으로 개칭한 후 프랑스국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표면적으로 이 신정권은 [[노동]], [[가족]], [[조국]]을 기치로 내세우며 은행가와 대지주 등 [[부르주아]] 계층의 지지를 얻고 독일과의 공조 하에 나름대로 대전기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등, 패전국치고 그리 나쁘지 않은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주권이 독일에 종속되어 제 입김을 내지 못하고 내적으로도 [[의회]] 기능이 멈추는 등, 국가로서 불완전했다. 국가 수반인 페탱은 본래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인망 높은 영웅이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르됭 전투]]에서 프랑스를 구원한 구국의 영웅이었고, 뛰어난 활약상에 힘입어 [[원수(계급)|원수]]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934년]]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격렬한 항전주의자였던 부하 [[샤를 드골]] 등에 반해, 페탱은 나치 독일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주화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총리]]였던 [[폴 레노]](Paul Reynaud)가 페탱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사임하면서 [[1940년]] [[7월 10일]] 페탱이 입법과 행정 전권을 쥐고 통치하는 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 개전 다음날 입대한 페탱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제3의 보불전쟁이란 틀로 이해했다. 당시 [[프로이센]]군에 참패하면서 [[나폴레옹 3세]]와 20만의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히자, 새로이 수립된 임시정부는 항복을 선언했고, 결사항전을 주장한 [[파리 코뮌]]을 독일군과 함께 공격하여 진압하였다. 이후 50억 프랑의 엄청난 배상금을 조건으로 강화협정을 체결하고 프랑스의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즉 자신이 이끄는 비시 프랑스는 전후 재건을 위한 발판이고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현실을 무시한 몽상가들로 본 듯하다. [[이탈리아 왕국]]까지 참전하면서 [[영국]]이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영국이 그대로 함락되고 독일이 전 유럽을 장악한다는 쪽에 베팅한 것이다. [[권위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페탱에게, 비시 정권은 평소에 페탱이 바라던 프랑스의 상을 실현할 기회였다. 독일군이 휴전협정을 폐기하기 이전의 비시 내각진을 보면 태반이 [[테크노크라트]], 즉 [[관료제|관료]]들과 [[교수]]들로 전쟁 이전부터 활동하던 [[파시스트]]는 보이지도 않으며 기껏해야 [[왕당파]] 정도나 듬성 듬성 보인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 대해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부정적인 입장이 팽배한 터여서, 패전을 기회로 프랑스를 개혁하자는 여론이 매우 강했다. 여기에 패전 책임을 공화정에 떠넘기려는 프랑스 군부의 의도는 덤. 페탱에게 프랑스 민주 정치의 몰락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결국 페탱 정권은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 정권이 되었다. 페탱의 노력으로 비시 프랑스 지역 거주민들이 [[독일 국방군|독일군]]에게 살육당하거나 전쟁 수행에 징발당하는 사태는 일단 모면할 수 있었지만 물자를 빼앗겼다. 독일군 점령 이후인 [[1943년]]에는 독일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일할 노동자들을 선발해서 독일로 보내는 강제 노동 제도(STO)가 시행되었다. 그나마 독일은 200만의 노동자를 요구했는데, 협상을 통해 프랑스 전쟁포로 11만명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60만의 노동자를 보내는데 그치긴 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숫자가 징용된게 사실이라 이 때문에 비시 정부의 인기는 더 떨어지고 [[레지스탕스]]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도 있었는데 다른 나치 점령지들보다 비교적 덜하기는 했다. 비시 프랑스는 [[https://en.wikipedia.org/wiki/Vichy_anti-Jewish_legislation|유대인의 사회참여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고 페탱은 이것은 독일이 명령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비시 정부의 자발적인 법령이라고 증언했다. 다만 유태인들이 해외로 탈출하는 것 자체는 막지 않았고 유대인의 가슴에 부착하는 노란 별은 금지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Vichy_France|영문 위키피디아 비시 프랑스 부분]]을 참조하여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이미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프랑스 '국내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보호를 하려 했으나,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이후로 프랑스로 망명을 신청한 '외국 유대인' 등에 대해서는 별로 보호할 의지가 없었다. 결국 75,000명 정도의 유대인은 잡혀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 중 대부분이 살해당했다. 어쨌든 타 독일 점령지들 중에서는 그나마 상식적인 정부가 남아있는 셈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도 학살보다는 공직추방 등이 주가 되었고, 주민들도 대부분 유대인들을 [[게슈타포]]와 독일군으로부터 숨겨주는 데 협조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은 이미 100년도 더 전부터 유대인들이 세속화된 채 섞여살았기 때문에, "격리되어 자기들끼리 살아오던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사회참여가 급격히 늘어났다"는 식의 반감이 만연한 중부 유럽보다 반유대주의가 약했다. 영국은 유대인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총리까지 선출된 바 있다.] 결과적으로 75%의 유대인이 살아남아서 유럽 내 독일 점령지에서 가장 적은 유대인 희생자를 낸 지역 중 한 곳이다. 비교하자면 [[네덜란드]] 같은 경우 유대인의 75%가, [[폴란드]]는 90%가 희생당했다.[* 폴란드는 외국으로 도피한 인구까지 고려하면 유대인 인구가 원래의 1%도 남지 않았다. 참고로 나중에는 독일계 인구도 추방당하고 비폴란드계가 많던 동부 영토도 상실하면서 본의 아니게 [[단일민족국가]]가 되어버렸다.][* 네덜란드는 주민들이 게슈타포와 독일군에 적극 협조한 터라 유대인 희생이 커졌는데, 이는 [[이원복]] 교수 시사만화 <[[현대문명진단]]> '[[안네 프랑크]]를 밀고한 사람들' 편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만 주민 협력도 협력이지만 그 이전에 나치 정권이 이들 국가에 특히 집중적인 행정력을 미친 결과로 볼 수 있다. 유대인의 중심지로서 게토와 절멸수용소가 위치해있던 폴란드는 말할 것도 없고, 네덜란드에서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의 주도로 철저한 유대인 사냥이 벌여졌다.] 기존 공화정과의 단절을 위해 프랑스 혁명 이래의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가 폐지되고 '노동, 가족, 조국'이라는 새 구호가 등장하였으며[* 급진파 민족주의자였던 [[프랑수아 드 라 로크]]가 만든 어구이다.] 혁명과 공화국을 상징하는 [[마리안(프랑스)|마리안]]도 각종 상징에서 사라졌다. 반영국 정서를 고양시키기 위해서인지 [[잔 다르크]] 숭배 열풍도 불었다는데 웬일인지 우리가 잘 아는 갑옷입고 칼 든 모습이 아니라 농가 처녀처럼 차려입은 모습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이는 점령자인 나치 독일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여자는 집에 있어야지'라는 고루한 사상의 짬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군이 포함된 연합군이 [[루앙]]을 폭격하자 영국에게 화형당하는 잔 다르크가 그려진 포스터를 붙이며 잔 다르크를 죽인 그들이 또 온다면서 반영감정을 부추겼다. 영국으로 망명한 [[자유 프랑스]] 측도 프랑스 국기에 잔 다르크의 십자가를 넣어서 잔 다르크를 숭배했다. 자유 프랑스측은 잔 다르크가 영국에 맞선 건 영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했을 뿐이며 지금의 프랑스에 쳐들어온 적은 [[백년전쟁]] 때처럼 영국이 아니라 독일임을 강조했고 비시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적에게 팔아넘긴 [[부르고뉴]]파와 똑같다고 주장했다. 상술된 것처럼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사상으로 제3공화정 후반기에 그나마 향상되었던 여성의 노동 조건을 도로 악화시켰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되었다고 한다. 왜냐면 수백만의 포로들이 그대로 독일에 남아 있었으니 가정을 먹여살리려면 누군가는 나와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는데 그게 바로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노동 조건이 매우 악화되었으니 여자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점령국인 독일군 밑에서 [[부역]]해야 할 때가 많았다. '정상적인' 직업을 얻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독일군을 상대로 [[매춘]]을 해야 한 사례도 많았다. 이는 전후 처벌한 나치 부역자 중 여성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이와중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일부 프랑스인들은 나치 독일이 이끄는 반공 십자군에 참여하기 위해 [[의용군]]인 LVF(Légion des Volontaires Français)에 가담하기도 하였고 비시 정부가 레지스탕스를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친독 반공 민병대(Milice)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전후에 숙청당한다. 특히 수장인 조제프 다르낭은 전후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아예 독일군에 자원 입대한 프랑스인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인 [[기 사예르]]라는 사람이 '잊혀진 병사'라는 회고록을 남겼는데 어머니가 독일계이며, 알자스 로렌에 살던 사람이다. 그는 후일 포로로 잡혀 [[연합국]]에 조사받을 때 징집이 아니라 자원입대라고 하자 프랑스 조사관들이 배신자라며 광분하다가 독일계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듣고 대충 이해해주었다. 순수 프랑스인이었다면 전후 처리에서 크게 피를 봤을 듯하다. 한편 [[1942년]] [[2월]]부터 [[1943년]] [[5월]]까지 프랑스 중부의 도시 [[리옹]](Lyon)에서 특별 재판을 벌였다. 이는 [[1940년]] 패배의 책임을 죄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 떠넘기기 위한 목적으로 열린 것이다. 가믈랭을 제외하면 군인 신분으로 피고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믈랭도 페텡의 공화정 폐지에 반대했다가 미움을 받은게 커서 재판에 끌려나왔다고 한다.] 전 총리인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레옹 블룸|앙드레 레옹 블룸(André Léon Blum)]], [[폴 레노]], 전 내무장관 조르주 망델(Georges Mandel), 전 항공장관 기 라상브르(Guy La Chambre), 전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모리스 귀스타브 가믈랭]](Maurice Gustave Gamelin) 등이 '피고'가 되었다. 한창 재판을 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재판은 중단되고 피고들은 독일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버렸는데 조르주 망델은 예외였다. 이 사람은 휴전협정 당시 [[프랑스령 모로코]]로 피신했다가 결국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어 재판에 넘겨졌는데 재판이 중지된 이후 레지스탕스가 친독 인사들을 연이어 암살하자 인질로서 총살당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이 '''[[유대인]]'''이었다. 연합국이 [[횃불 작전]]을 발령하여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고 프랑스군이 항복하자 빡친 히틀러의 명령으로 [[1942년]] [[11월]]에 [[프랑스 군정청|독일군이 비시 프랑스 관할 지역을 점령]]하면서, 비시 프랑스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